|
젬젬
|
2004-12-20 18:51:30, 조회 : 577, 추천 : 133 |
내가 유년을 보냈던 집에서 30여분 거리에 사셨던 큰댁은 얕으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있고 동네와는 좀 떨어져 있어도 양지바른 언덕에서
훤히 건너다 보여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바깥마당을 지나 밭한가운데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은 언제나 울울창창한
나무가 하늘을 가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한웅큼씩 걸린 것 처럼 보였다.
숲길 끝에는 바가지로 떠먹을수 있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장마가 끝날 무렵이면 송사리떼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다 샘물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참붕어가 뻐끔거리며 하늘을 향해 무언의 시위를 하다가도
작은 소리에도 재빠르게 돌 틈 속으로 숨어 버리는 우물안은 소나무 그림자를
일년 내내 담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유영하는 하얀구름으로 순식간에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성산자락을 품으며 좁게 흐르던 물이 마을로 내려 오면서 냇가는 점점 넓어지고
냇가 윗쪽으로는 낮은 흙담을 한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다.
숲길끝에서 이어지는 돌 징검다리는 그 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마을로 내려오거나 외부로 나가려면 건너야하는 징검다리는 그집의 고단함처럼
언제나 그자리에서 그집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조하며 가난을 씻어내듯 세월과 함께했다.
방하나 부엌한칸 사립문으로 엮어진 대문너머로 댓돌위에 벗어둔 신발로 주인이 있고 없는지
밖에서도 집안을 살필수가 있었다.
그 집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갖가지 꽃들이 철 맞춰서 피고지고했다. 집주변은 멀리서
보면 그림엽서에 나오는 풍경처럼 꽃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큰집을 가면 그곳에서 노느라
시간이 늦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큰엄마는 꼬부라진 허리때문에 이마가 땅에 닿을것 처럼
걸어서 날 찿으러 오셨다. 굽은등에 손을 얹고 한손으로는 내손을 붙잡고 걸으시면 투박한 손끝으로
전해져 오던 큰엄마의 온기는 일곱살 계집아이가 그려낼수 있는 감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푸석하고
밋밋한 웃음뿐이였다.
늦은 봄날이면 미나리 아제비가 치자빛 옷감을 널어 놓은것 처럼 보이던 풍경들은 내가 어른이
된 후에도 목마른 기억으로 남아 울적한 날은 그 풀냄새와 풍경이 몹시도 그립게 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하나씩 깨우쳐 가던 때여서 였을까. 그때 익혀둔 이름들이 지금도 선명한것을
보면 유년의 기억이 그 사람의 성장을 느리게 또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사고를 갖을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것도 같다.
큰댁 뒷산에서 피고 지던 수많은 들꽃들. 유월이면 찔레꽃과 아카시아 향기에 숨이 멎을것 처럼 향기롭던 기억. 가을이면 온동네 벌들을 불러들이던 감국의 숨길수 없는 향연은 순박하게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온 착한 사람들에게 신이 주시는 축복이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는것처럼 큰댁은 서울로 이사를 가고 큰아버지와 큰엄마는 옛집 마당위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계시다. 소나무 숲은 노송으로 바뀌고 풍상으로 이가빠진것 처럼 드문드문 빈자리도 많아
햇볕이 나뭇가지사이로 그네타기를 하고 송사리떼가 물주름을 일으키던 옹달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림엽서 같던 집터도 풀숲으로 변해버리고 내가 건너기에 벅차던 징검다리는 물살에
떠내려갔는지 먼 기억속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친정을 갔을때 어린날의 하루를 더듬으며 갔다가 짐작도 할수 없게 변해버린 주변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던 날이 떠오른다.
삽화같은 추억은 어디에도 없고 아름다운 흑백그림처럼 내 기억에만 남아 있을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