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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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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0 19:00:53, 조회 : 631, 추천 : 115 |
"고모 우리 강화로 바람이나 쐬러 같이 갈래요?" 하는 큰조카의 전화를 받은 건 아침시간이 지난 후 였다. 장마철이라는 기상대 예보는 가뜩이나 눅눅해지는 여름철 에 마음까지 가라앉게 해서 어떻게 기분전환을 할까 하던 차에 큰조카의 전화를 받고 보니 텔레파시가 통한 것 처럼 느껴지는 건 피붙이라 그런 것일까? 나와는 여덟 살 차이가 나서 조카 겸 동생 같아 다른 조카들 보다 더 정이 가지만 마음 씀씀이는 나보다 훨씬 넓어 내가 부끄러워질 때 가 한 두번이 아니다.
철이 들기 전부터 들어온 "고모"라는 명칭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 아무개 고모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고모가 계셨다. 아버지는 여동생이 두 분 계셨지만 막내고모는 부산에서 사신 까닭에 서 너번 뵌 것으로 막내고모라는 자리를 비워 두셨다.
둘째 고모는 왕산이란 동네지명을 따서 왕산이 고모라고 불렀다. 어린 남매를 유산처럼 남겨 놓고 고모부가 돌아가셔서 스물 일곱이란 청청한 나이에 청상이란 가혹한 이름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고모. 채씨 문중 에서 어린 남매를 데리고 바람막이하나 없는 하루하루는 고모가 견뎌 내기 힘든 세상살이의 첫 장에 불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고모를 아버지는 생인손을 앓는 것처럼 아파하셨다. 고모가 잠시라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친정 오라버니 밖에 더 있었을까. 고모는 모든 대소사를 아버지와 의논하고 믿고 의지했다.
명절 뒷 날이면 함지박에 약주 술과 떡을 담아 이고 십리 도 넘는 길을 걸어 오셨다. 아침상을 물리신 아버지는 행여 고모가 안 오실까 봐 몇 번 이고 내다 보라고 채근을 해 언니와 나는 작은 대문으로 나가 염전둑 쪽을 바라보며 까만 점이 점점 커지며 고모의 실루엣으로 닥아 오면 큰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뛰어들면 아버지의 얼굴엔 쓸쓸한 웃음이 순식간에 번지다 사라지곤 했다.
먹고 사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으련만 고모는 부지런하고 알뜰해서 땅마지기나 거느린 문중사람들한테 보란 듯이 자신의 울타리 을 쳐가며 한뼘 씩 재산을 늘려 갔다. 그 일이 고모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 였으며 자신을 제어하는 힘든 고행 이였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고모만의 표면 적인 삶은 땅속 깊은 심층토를 뚫고 내려간 잡초의 뿌리처럼 단단한 옹이가 마디 마디 박힌 것과 같았다.
하얀 광목앞치마를 입고 볼받아 기운 버선은 솔기에 대고 그려 붙인 그림처럼 흠잡을 곳 없었다. 고모는 언제나 홑 버선을 덧신고 다녔다. 한여름에도 맨발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자신을 내면으로부터 철저하게 다스리며 사셨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싫어하기도 했지만 고모의 내면을 들여다 *지 않고 어떻게 쉽게 말을 했을까? 아욱꽃처럼 소박한 고모의 슬픔조차 흰머리 감추듯 한 그 긴 세월의 굽이 를 누가 알기나 했을까?
조카들에 대한 사랑표시는 언제나 "내 강아지"란 말로 고모가 표현하는 최고의 언어였다. 자주는 못 갔지만 고모집을 가면 우리 조카들 왔다며 고모는 자랑 아닌 자랑을 이웃에게 하며 알게 모르게 겪었던 설움을 그렇게 라도 되돌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논의 개구리가 서럽게 울어 대던 날. 고모는 당신이 가는 뒷모습 조차 누구에게 보여 주기 싫어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으로 생전에 아끼던 양단이불과 함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안개로 가리고 가셨다. 그 안개가 걷히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 일상으로 돌아와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셔서 그랬을까?
내 강아지로 불렸던 나도 흰머리 희끗한 중년으로 접어들고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조카도 불혹을 넘겼다.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고모가 남기고 간 마지막 이별은 언제나 슬픈 잔영으로 남아 고모을 기억 할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저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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